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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소설 정기룡] 제 1부 등불이 흐르는 강<제 9회> 제 1장 떠나는 두 사람. 9 주모는 당황한 김씨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소리만 내뱉었다. “내가 마침 일손이 부족해서 사람을 하나 뒀으면 하는데 어떠오? 우리 자매처럼 여기서 잘 지내면서 입벌이나 하는 것이? 소금 장사보다 백배 천배는 나을 거요.” “말은 고맙지만 나는 이런 일은 체질에 맞지 않네.” 주막은 뭇 사내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하루 종일 그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결코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수를 그런 곳에서 키우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어릴 때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한데, 주막에서 자라면 그 보고 듣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술주정뱅이나 왈패가 되기 십상이 아닌가 말이다. 주막을 뒤로 한 채 김씨는 무수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주모가 배웅을 하면서 아쉬워하였다. “쯧, 자고로 계집은 사내의 그늘에 있어야 하는 법인데...... . 여자 몸으로 여러 날 길품 팔다가 봉변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김씨의 걸음은 당산골에서 떠나올 때나 강주골에서 떠나올 때와 달랐다. 고향을 등질 때에는 한탄스러운 걸음이었고, 강주골을 나올 때에는 천근만근 무거운 걸음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머리에 인 보따리가 하나도 무겁지 않게 느껴졌고 노랫가락까지 흘러나왔다. “뭐가 그리 좋으셔요?” “좋은 일이 있어서 좋겠느냐. 기분을 좋게 가지면 좋아지는 거지.” 가다 쉬다 하는 동안 진주성을 지났다. 높다란 촉석루며, 그 밑을 흐르는 푸른 남강이며, 강 위를 떠다니는 돛배며 나룻배며, 성내외 수많은 집이며 사람이며...... . 과연 대처는 대처였다. 김씨는 속으로 흐뭇하였다. “이 많은 사람들이 소금 없이는 살지 못할 터이지, 암.” 강주골에서 염창나루까지는 또 백리 길. 사나흘은 꼬박 걸어야 되는 길이었다. 다리쉼을 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한테 길을 물었다. 그는 손을 들어 가르쳐 주었다. “저 산 말굽고개를 넘어가면 염창나루가 굽어보일 게요.” 무수는 김씨의 의도가 의아해졌다. “소금 장사를 할 작정이셔요?” “뭘 하든 우선은 우리가 정착할 곳을 찾아야 하지 않겠니? 묵은 고을에 난뎃사람으로 들면 이목이 쏠려 여러 가지로 불편해질 것이다. 그러니 수시로 장사치들이 드나드는 나루터나 장터 같은 곳이 우리가 살기에는 나을 것 같구나.” “어머니 좋을 대로 하셔요.” “우리가 어디에서 살더라도 무수 너는 또래 아이들과 싸우지 말고, 특히 위험한 곳에는 다시는 가지 말고, 서당에 보내줄 테니 글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알겠지?” “장수가 될 건데?” “장수도 글을 알아야지. 나라의 명령을 받으면 읽을 줄을 알아야 되고, 또 장계(狀啓:관원이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를 쓰기도 해야지. 궁검만 잘한다고 장수가 되는 게 아니란다.” 방어산 고갯마루를 향하여 올라갔다. 길 가에 봇짐장사치 둘이 앉아 쉬다가 희롱을 해 왔다. “그년 참 반반하게도 생겼네.” 김씨는 무수의 손을 잡고 서둘러 그들을 지나치려고 하였다. 그들 중 하나가 일어섰다. “좀 쉬다가 가지 그러나.” 무수는 얼른 허리춤에서 팔매줄을 빼 들었다. 다가오는 사내의 얼굴을 냅다 후렸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손바닥 사이로 피가 새어나왔다.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났다. “이놈이?” 무수는 길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팔매에 재고 머리 위에서 빙빙 돌리다가 휙 하고 한쪽 줄을 놓으며 후렸다. 돌멩이는 총통의 철알처럼 날아가서 걸어오던 사내의 얼굴을 때렸다. “윽!” 그걸로 끝이었다. 두 사내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간신히 통증을 참을 뿐이었다. 무수는 김씨의 손을 잡고 걸음을 나는 듯이 하였다. 두 사람은 헐떡이며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사방이 훤히 보였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남강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고 있었고, 강 위에는 배들이 점점이 떠 있었다, 강 건너 나루터에도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고, 나루터 좌우로 모래벌판이 눈부시게 빛났다. 강가에는 집들이 많았다. 강가 왼쪽에 고즈넉한 마을이 하나 보였다. 김씨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일단 그곳으로 가서 우거(寓居:남의 집에 잠시 빌붙어 삶)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떠냐? 좋아 보이지 않니?” “어머니만 좋으시다면 저는 다 좋아요.” “아까 그 치들이 따라오기 전에 얼른 내려가자꾸나.” 고갯마루를 서둘러 내려갔다. 산 중턱 아래에 큰 집채들이 있었다. 경상우도 제일의 염창, 소금창고였다. 그곳을 지나쳐 내려갔다. 이윽고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여기는 무슨 고을이라고 하지요?” “무듬실이오.” <제 2장에 이어집니다>(다음에 이어서 매주 월요일 연재 됩니다.)(작가 소개) 하용준 작가는 대구 출신으로 현재 경북 상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장편소설 ‘유기(留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장편. 단편소설, 시,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장편소설‘고래소녀 울치’는‘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 도서’와 ‘2013년 올해의 청소년 도서’에 동시 선정되었다. 시집 ‘멸(滅)’은 ‘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으며 제1회 문창문학상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 관련기사)http://www.smi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16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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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소설 정기룡] 제 1부 등불이 흐르는 강<제 8회> 제 1장 떠나는 두 사람. 8 김씨가 언성을 높였다. “우리 아이에게 웬 행패인가?” “내가 무슨 행패를 부렸다고..... . 모를 일일세.” 주모는 제 팔뚝을 문지르면서 다시 쌀쌀맞게 말하였다. “묵어가려면 선금 내오. 하룻밤 방화료로 쌀 한 되 금이오.” “베로는 어찌 받나?” “석 자만 끊어 주오.” 김씨는 독방을 하나 정해 들었다. 보따리를 풀어 베를 넉넉히 잘라 들고 나가 주모에게 주었다. “옛소. 넉 자 끊었으니 우리 아이에게는 고깃국으로 주오.” 이윽고 밥상이 들여졌다. 시커먼 잡곡밥에 소내장국이 국대접에 가득 담겨져 있었다. 반찬으로는 무짠지 간장 된장이 다였고, 물 한 그릇도 놓여 있었다. “어서 많이 먹거라.” 김씨는 국을 반이나 덜어 무수에게 주었다. 무수는 남김없이 다 먹었다. 배를 불린 두 사람은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다. 어디든 살 곳을 정해야지.” “어디?” “그건 아직 모르겠구나. 이 어미도 막막하고 답답하다만 설마 하니 우리 두 모자 발 디디고 살 땅이 없겠니?” 무수는 인수가 준 비단주머니를 김씨 앞에 내어놓았다. 대추씨만한 은자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얻게 된 내막을 들은 김씨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작은도련님이 인정이 제일 많긴 하였지. 그건 무수 네가 잘 지니고 있거라.” 콧물을 훌쩍인 김씨는 방바닥 여기저기에 손바닥을 대어보았다. “방이 차구나. 불을 좀 때달라고 해야겠다.” 마당에 놓인 평상에서 주모가 웬 사내와 마주 앉아 있었다. 평상 옆에는 큰 섬통을 얹은 지게가 지겟작대기에 받쳐져 있었다. 주모는 김씨에게 웃는 낯을 보였다. “이녘은 우리 서방님이라오. 먼 길 갔다가 이제 돌아왔나 했더니, 아, 내일 새벽바람으로 또 길을 나서야 한다는구려.”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굵은 음성을 내었다. “살림을 일구려면 부지런히 다녀야지. 이 주막은 뭐 흙을 져다 팔아서 차려준 줄 알아?” “그렇긴 하지, 암.” 김씨는 돌아서 있다가 둘의 대화가 잠시 끊긴 틈을 타서 방이 차다고 말하였다. 주모가 아직 불을 땔 때가 아니라고 하자 사내가 버럭 호통을 쳤다. “이것 봐. 찾아든 길손을 홀대하면 되겠어? 얼른 가서 쩔쩔 끓도록 불을 때드려. 그래야 소문을 듣고 많이 묵어가지.” 김씨는 방으로 들어왔다. 무수는 바람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김씨는 이불을 펴 무수를 바로 눕힌 뒤에 방문 앞에 바짝 다가앉았다. 술을 한 사발 마신 사내의 말소리가 크게 들렸다. 소금장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소금을 팔아 큰돈을 번 장사치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소금 말통을 이고 팔러 다니는 아낙들의 이야기까지 김씨는 마치 별천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외상으로 떼어다가 팔고 나서 본금을 갚으면 되니까 밑천이 거의 안 드는 장사지. 부지런한 아낙들은 밥술만 뜨다 뿐인가 어디? 소금을 팔아서 집 사고 땅 사고 한 아낙들도 많은데, 임자는 여기 가만히 앉아서 돈벌이를 하니 얼마나 좋은 팔자야? 안 그래?” 김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소금이라...... .” 방바닥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곧 따뜻해졌다. 김씨는 무수 옆에 누웠다. 등이 뜨끈해지는 것이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세상없이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사내는 이른 새벽에 떠나고 없었다. 주모가 평상에 걸터앉아 허망한 눈길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셨나 보네?” “그러게 말이오. 서방인지 길손인지 나 원.” 김씨는 조심스럽게 주모에게 물었다. “지게에 진 것이 소금인 것 같던데, 나도 소금 장사를 좀 해볼까 해서 그러는데...... .” 주모는 단번에 잘라 말하였다. “어젯밤에 뭔가 들은 모양인데, 댁네는 그 몸으로 어림도 없소. 소금팔이가 얼마나 힘든 일인데, 웬만한 사내들도 아서라 말아라 하는 일이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어찌하면 소금 장사를 할 수 있는지 그 방도나 좀 가르쳐 주게나.” 김씨는 주모의 치마 밑에 슬쩍 손을 밀어 넣었다. 주모는 더듬어 보더니 집어 들었다. “이게 뭐야? 세상에나? 조선통보 아니오?” “내게 잘 말해주면 한 닢 더 줌세. 응?” 주모는 돌아앉으며 입맛을 다셨다. “예서 동쪽으로 백리 못 가서 큰 나루가 나올 것이오. 염창나루라고 하는 곳인데, 진주 남강 열두 나루에 소금이란 소금은 거기서 다 대고 있소. 거기 가면 소금 장사를 할 길이 생길지도 모르니 그리로 가 보오.” 김씨는 환하게 웃으며 동전 한 닢을 더 주었다. 주모가 김씨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 김씨를 다시 앉힌 주모가 입에서 단 소리를 내었다. “이제 보니, 참 곱게 생겼소. 어디 양반댁 후실로 있다가 딸린 자식을 데리고 살림을 나는 거 맞소? 아마 맞을 거요.” “아, 아닐세. 별 희한한 소리를 다 하는구먼.”(다음에 이어서 매주 월요일 연재 됩니다.)(작가 소개) 하용준 작가는 대구 출신으로 현재 경북 상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장편소설 ‘유기(留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장편. 단편소설, 시,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장편소설‘고래소녀 울치’는‘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 도서’와 ‘2013년 올해의 청소년 도서’에 동시 선정되었다. 시집 ‘멸(滅)’은 ‘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으며 제1회 문창문학상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 관련기사)http://www.smi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16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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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소설 정기룡] 제 1부 등불이 흐르는 강(제 7회) 제 1장 떠나는 두 사람.7 “시오 리나 남았나 모르겠구나.”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부지런히 걷기를 두어 시각. 길이 넓어지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김씨는 무수에게 길을 물어보라고 일렀다. 무수는 다가오는 등짐장수 앞에 섰다. “말 좀 물읍시다. 강주골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곧장 오리쯤 가면 나올 거요.” 얼마쯤 가자 멀리 고을이 하나 나타났다. 큰 버드나무도 보였다. 김씨는 무수의 손을 잡고 힘을 내어 걸었다. 정호가 일러준 대로 큰 버드나무가 서 있는 집 앞에 섰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문고리를 쥐고 두드렸다. “이봅시오.” 문이 열리고 험상궂은 머슴이 나타났다. “뉘오?” “예가 강주골 정 참봉댁이 맞는가?” “그러하오만?” “이거 내가 제대로 찾아왔군그래. 이 댁 나리마님께 좀 고해 주게. 곤양 땅 당산골에서 온 정무수 모자라고 한다네.”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머슴이 처음보다 더 험악한 인상을 지었다.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시오. 잘못 찾아온 것 같으니 딴 데 가서 알아보오.” “아니? 아닐세. 틀림없이 바로 찾아왔네.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네. 이를 어쩌나. 이보게. 내 직접 들어가서 나리마님께 아뢰면 안 되겠는가?” “어허, 이 아낙네가 예가 어디라고? 썩 물러가오.” 머슴은 문을 닫으려고 하였다. 김씨는 바짝 붙어 서서 애원하듯이 말하였다. “이보게. 우리 나리, 곤양군 금양면 당산골에 정거하시는 우리 나리의 성은 정씨이고 함자는 호 자 일세. 다시 한 번만 아뢰어 주게나, 응?” 머슴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들어갔다. 그러더니 달려들듯이 나와서는 큰 소리를 내었다. “예끼, 썩 물러가오! 나 원 별...... .” “이보게, 이보게! 이 댁에서 아니 받아주시면 우리 모자, 오갈 데가 없다네. 내가 직접 뵙고 여쭙게 해 주게. 응? 제발 부탁하네.” 예기치 않은 문전박대에 김씨는 그대로 길 가에 나앉게 될 것 같아 겁이 더럭 났다. 머슴은 그런 김씨를 떼어내고 대문을 닫으려고 하였다. “이보게, 정 그러면 이 댁에 허드렛일이든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헛간에서라도 좀 살게 해 주게. 이보게. 제발...... ” 김씨는 갖은 떼를 쓰며 매달렸다. 하지만 머슴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냉담하기만 하였다. 문간 안에 매어놓은 큰 개가 연신 짖어대고 있었다. “더 시끄럽게 하지 말고 어서 가오.” “이보게!” “자꾸 시끄럽게 굴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오. 잡혀 가고 싶소?” 대문이 철컹 닫혔다. 김씨는 그 자리에 털썩 퍼질러 앉고 말았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아찔해졌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허연 신령이 나타났다. 일어나라고 엄히 꾸짖었다. 오래 전, 뱃속에 무수를 가졌을 때 들렸던 바로 그 소리와 똑같았다. 김씨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무수가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김씨는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어머니, 괜찮으시어요?” “아, 내가 잠깐 실신한 모양이로구나.” 김씨는 앉은 채로 있었다. 얼굴엔 낙담하는 빛이 아니라 차츰 결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윽고 신음 같은 소리를 내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김씨는 툭툭 치맛자락을 털고 일어났다. 땅에 떨어진 보따리를 들고 다시 머리에 이었다. 그리고는 무수의 한 손을 꼬옥 잡았다. “가자.” “어디로요?” “이젠 우리 모자, 어디에도 의지하지 말고 우리끼리 살아나가야 한다. 마음 단단히 먹거라.” 김씨는 발길을 돌려 강주골에서 나왔다. 당산골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길은 진주로 나 있었다. “기왕이면 대처로 가자.” 해가 막 지려는 참이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해 몹시 허기가 졌다. 김씨는 더 이상 남의 집에서 얻어 자는 잠도 자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막막하였지만 우선은 쉬고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다음의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자 싶었다. 한참을 가자 높은 깃발이 내걸린 주막이 보였다. “오늘은 저기 가서 묵자꾸나.” 주막에는 손님이 몇 없었다. 주모가 두 모자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이 그러오? 길손 처음 보는가?” “이런 길손은 처음이라서...... . 어디서 야반도주라도 한 게로구먼?” “이 아낙네가? 큰일날 소리를 다 하네?” 주모는 가재눈으로 무수를 재차 살펴보더니 삐죽거렸다. “그것 참. 다 큰 정남 티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낯짝엔 어린애 티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 갑자기 주모는 무수의 허리춤을 슬쩍 들추었다. “어라? 호패가 아니라 팔매줄을 찼네그래?” “이 손 치우시오!” 무수는 주모의 팔을 쳐 내었다. 주모가 단발 비명을 질렀다. “아얏!” 무수의 팔힘이 묵직하고 목소리가 우렁차 움찔하며 한 발 물러섰다.(다음에 이어서 매주 월요일 연재 됩니다.)(작가 소개) 하용준 작가는 대구 출신으로 현재 경북 상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장편소설 ‘유기(留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장편. 단편소설, 시,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장편소설‘고래소녀 울치’는‘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 도서’와 ‘2013년 올해의 청소년 도서’에 동시 선정되었다. 시집 ‘멸(滅)’은 ‘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으며 제1회 문창문학상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 관련기사)http://www.smi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16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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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소설 정기룡] 제 1부 등불이 흐르는 강(제 6회) 제 1장 떠나는 두 사람.6 “날이 곧 어두워질 텐데 어딜 가려고?” “염려 마시어요. 얼른 다녀올게요.” 무수는 뒷산 중턱으로 내달렸다. 산굴 앞에 이르러 털썩 주저앉았다. 숨을 고른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동무들아, 미안해.” 죽은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거듭 사죄를 하였다. 그리고는 비장감이 묻어나는 말을 하였다. “난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당산골로 돌아오지 않을 테야. 죽어서도 안 올 거야. 그러니 이제 너희들한테 찾아오지도 못해.” 하고 싶은 말을 다 마친 무수는 옆으로 돌아앉았다. 먼 남해 바다 위로 노을이 비끼고 있었다. 무릎을 두 팔로 껴안고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여기 있었구나?” 인수의 목소리였다. 무수는 일어났다. “예, 작은도련님.” “아무도 없을 때에는 형이라 부르라고 해도 자꾸 그러는구나.” 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 앉거라.” 둘은 나란히 앉았다. 인수는 노을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아버지께서 떠나라고 하셨다지?” “예.” “우리가 비록 어머니는 다르다고 해도 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엄연한 형제다. 어딜 가서 무얼 하더라도 그것만은 잊지 않도록 하거라, 알겠니?” “예, 작은도련님, 아,아니 작은형님.” 인수는 허리춤에 찬 비단주머니를 끌러 무수에게 건넸다. 무수는 선뜻 받아들지 않았다. “형이 주는 거니까 괜찮아. 꼭 필요할 때 팔아서 쓰거라. 돈닷냥은 될 게다.” 인수는 무수의 손을 잡고 비단주머니를 쥐어 주었다. “그만 내려가자.” 산을 내려오는 내내 인수는 무수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고을에 들어서서야 인수는 무수의 손을 놓아 주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무수는 몇 걸음 뒤에 처져서 땅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 날이 밝자 김씨는 무수를 앞세워 사랑채로 갔다. 정호는 면포에 싼 것을 내어 놓았다. “얼마 안 되는 것이네만, 요긴할 때 쓰도록 하게.” 김씨가 집어넣는 것을 보고는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진주 강주골로 가게. 거기 사는 일가한테 무수가 정남(丁男:군역을 담당하기 시작하는 15세 이상의 남자)이 될 때까지 두 모자를 보살펴 달라고 기별해 놓았네. 강주 고을을 찾아가면 큰 기와집 앞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서 있을 것이네. 바로 그 집을 찾아가서 내가 보냈다고 하면 거두어 줄 것일세.” 김씨는 무수를 일으켜 정호에게 큰절을 하였다. “나리, 부디 만수무강하소서.” 정호는 김씨와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무수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무수는 하직 인사를 하였다. “만수무강하소서.” 정호는 다정스런 목소리로 무수에게 물었다. “그래 무수 너는 뭘 챙겨 가는고?” “봇짐하고 팔매줄을 갖고 가옵니다.” “궁시(弓矢:활과 화살)는 어떻게 하고?” “그건 잘 부러지는 것이라...... .” “가거든 어미 잘 모시고 있다가 내가 기별을 하면 그때 돌아오거라. 알겠느냐?” 무수는 대답 없이 고개만 숙였다. 곤양 당산골에서 진주 강주골까지는 백리 길. 아낙의 걸음으로는 사흘반걸이였다. 길잠을 얻어 자며, 주막잠도 자며 걷고 또 걸었다. 김씨는 큰 보따리를 이고, 무수는 작은 봇짐을 메었다. 두 모자는 붙은 듯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김씨는 낯선 세상에 내쳐진 것만 같았지만 든든한 아들이 곁에 있어 위안이 되었다. 떠나온 것이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무수가 당산골에 있어봐야 좋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었다. 무수가 커가면 커갈수록 산굴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괄시가 더욱 거세질 것 같았다. 내 자식은 비명에 죽었는데, 남의 자식은 번듯하게 살아 있는 것만큼 억울하고 한 맺히는 일이 어디 있으랴 싶었다. ‘그래, 다 잊고 새 고을에서 새로 시작하는 거야.’ 영험한 아들을 낳기 위해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목숨이 아닌가 말이다. 죽은 지 이레 만에 되살아난 모진 목숨으로 무엇인들 못하랴. 살이 마르고 뼈마디가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무수를 잘 키워내고자 하는 일념뿐이었다. “우리 무수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어떤 적에게도 지지 않는 장수가 될 터여요.” “글공부해서 정승 판서는 되고 싶지 않아?” “작은형님이 그건 어렵다고 했어요. 저는 무과밖에 볼 수 없다고 하였어요. 정승이든 판서든 저는 시켜 줘도 안 할래요. 장수가 제일 나아요. 부하들을 호령하고 천지사방으로 말달리는 장수요.” “그래. 그러면 꼭 큰 장수가 되려므나.” 모퉁이를 돌아들었다. 길 가에 샘터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짐을 내려놓고 목을 축였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다음에 이어서 매주 월요일 연재 됩니다.)(작가 소개) 하용준 작가는 대구 출신으로 현재 경북 상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장편소설 ‘유기(留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장편. 단편소설, 시,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장편소설‘고래소녀 울치’는‘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 도서’와 ‘2013년 올해의 청소년 도서’에 동시 선정되었다. 시집 ‘멸(滅)’은 ‘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으며 제1회 문창문학상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 관련기사)http://www.smi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16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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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소설 정기룡] 제 1부 등불이 흐르는 강(제 5회) 제 1장 떠나는 두 사람.5 “이 풍헌,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나?” “그 책임을 전적으로 회피하고 있지 않다는 뜻을 어떤 방식으로든 내보여야겠지.” “고을 민심을 수습하라...... .” 정호는 풍헌이 일러준 대로 하였다. 우선 지난날에 군아 초초청에서 무수의 대변을 잘해 준 좌수에게는 그 사례로 벼 한 섬을 갖다 주었다. 고을 사람들이 대부분 계원으로 있는 당산계에는 산굴 사건을 인지상정의 차원에서 속죄하고 삼가는 뜻으로 벼 석 섬을 내어 놓았다. 또 용하다는 만신을 불러다 산굴 앞에서 떠들썩한 씻김굿판도 벌였고, 이어 염불을 잘한다는 중까지 데려다가 큰 재를 지내며 극락왕생도 빌어 주었다. 그러나 정호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을 민심은 여전히 냉담하기만 하였다. “더 이상 뭘 어찌한단 말인가.” 고을사람들이나 장사치들이 집안에 들지 않는 것은 견딜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소문이 어디까지 퍼져나갔는지는 몰라도 다른 고장에서 흘러들던 과객도 들지 않는 것이었다. 팔도 유림에 산굴 사건에 대하여 좋지 않은 풍문이라도 퍼져 나갔을 것만 같았다. 정호는 큰 시름에 잠겼다. 유림에서조차 홀대 받는다는 건 가문의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어맛! 에구머니나!” 안채 뜰을 가로질러 가던 계집종이 비명을 내질렀다. 목을 딴 너구리의 사체가 담 너머로 던져져 있었다. 그 사태를 전해들은 정호는 혀를 찼다. “허어, 어찌 이리 날이 갈수록 흉악스러울꼬!” 배를 가른 것, 사지를 자른 것까지 날이면 날마다 담 너머로 날아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개와 소 같은 짐승의 오물까지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정호의 집안사람들은 한낮에도 마당에 내려설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게 무슨 냄새냐?” 이른 새벽에 일어난 정호는 코끝을 파고드는 구린 냄새에 몹시 불쾌해졌다. 누군가 간밤에 장대바가지로 인분을 퍼다가 대문 앞에 부어 놓았다는 아룀이었다. “내 이제는 정녕코 그냥 두고 보지 않으리!” 정호가 아침 식후에 옷을 차려 입으려는데 안채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달려온 종이 아뢰었다. “내당마님께옵서 돌멩이에 맞으셔서 그만...... .” 담 너머로 날아든 돌에 홍씨가 맞아서 이마가 깨어진 것이었다. 홍씨는 머리동이를 처매고 자리에 누워만 있을 뿐 일어나지 못하였다. 정호는 그 길로 풍헌의 집을 찾았다. “그러잖아도 좌수 어른께옵서 자네를 좀 보았으면 하고 계셨네.” 풍헌은 정호를 데리고 읍내 관아에 있는 향청으로 갔다. 좌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당산고을 백성들이 줄기차게 보내는 무언의 경고가 아닌가 말일세. 마냥 손 놓고 있으면 모르긴 해도 해악을 부리는 정도가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네.” 정호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자네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집에 불을 놓거나, 물독에 비상을 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나? 입에 올릴 말은 아니네만, 종국에는 살옥이 일어날지 어떨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바일세.” 좌수는 사람을 해하려 들 것이라는 우려까지 보였다. 정호는 곤혹스럽기만 하였다. “시생이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산굴이 무너져 아이들이 죽은 책임을 자네 자제에게만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네 집안에 엄중히 묻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로서는 굿판도 벌이고, 재도 지내주고, 할 도리를 다 한다고는 하였사옵니다만.” “민심이 워낙 사나워져서 그런 정도로는 되지 않네.” “하오면, 무수를 산굴 앞에 제물로 바치기라도 하라는 말씀이옵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서도 안 되고, 저들이 만에 하나 어떤 방도로든 무수를 해하게 되면 서로 원한만 얽힐 뿐일세.” 정호와 좌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풍헌이 입을 열었다. “자네 집안을 위하고, 자제를 위하고, 그러면서 고을사람들을 달랠 만한 묘안을 찾아야 하겠군.” “그렇다네. 당산고을 전체가 그만하면 되었다고 할 만한 일, 고을 백성들이 다 수긍하고 받아들일 만한 결단이어야 할 걸세.” “그게 대체 뭐란 말씀이옵니까?” “곰곰이 생각을 해 보게. 모두를 위하는 묘책이 무엇인가를.” 집으로 돌아온 정호는 두문불출하고 몇날며칠 고민에 빠져 들었다. 좀처럼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을 사납게만 대하는 고을 민심을 풀 방법,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히려 더 꼬여드는 것만 같았다. 대문 옆 감나무에 열려 있는 큰 감들이 차츰 붉은 빛을 띠어갔다. 마치 불방울이 수도 없이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정호는 그것들이 떨어지면 온 집안에 불이 옮겨 붙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민심이 더욱 사납게 타오르면 집안에 불 뭉치가 날아들 수도 있다는 좌수의 말이 좀처럼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이 또한 그들의 명운이거늘.” 정호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내당 아래채에 있는 김씨를 불렀다. “무수를 데리고 이 집안을 떠날 채비를 하게.” 김씨는 깜짝 놀랐다. “소첩이 고을 사람들 앞에서 목숨을 끊겠습니다. 제발 무수만은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내 여러 날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일세. 자네들 두 모자가 가서 생도방(生道方:삶을 살아나갈 방법)을 마련할 때까지 약간의 재물을 내어줄 것인 즉, 다른 말은 하지 말게.” “나리!” “무수를 위해서나, 집안을 위해서나 이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네.” 김씨는 하루 종일 눈물을 훔치고 있다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주섬주섬 보따리를 쌌다. 윗목에 기대어 있다가 그것을 본 무수는 곧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다음에 이어서 매주 월요일 연재 됩니다.)(작가 소개) 하용준 작가는 대구 출신으로 현재 경북 상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장편소설 ‘유기(留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장편. 단편소설, 시,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장편소설‘고래소녀 울치’는‘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 도서’와 ‘2013년 올해의 청소년 도서’에 동시 선정되었다. 시집 ‘멸(滅)’은 ‘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으며 제1회 문창문학상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 관련기사)http://www.smi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16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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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소설 정기룡] 제 1부 등불이 흐르는 강(제4회)제 1장 떠나는 두 사람.4 “파청이오!” 앞서 북을 쳤던 고군이 이번에는 징을 크게 한 번 울렸다. “쿠앙!” 부모들은 관아의 삼문을 나서며 저마다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쳇, 양반 자식이라서 무죄냐.” “온양반도 아니고 반양반인 놈을.” “우리 업동이 억울해서 이를 어째!” “으음, 어디 두고 보자.” 사흘이 멀다 하고 사랑 문턱을 넘나들던 고을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집안의 대소사를 물으러 사랑채 안채 할 것 없이 드나들던 걸음들이었다. 집안사람들이 밖으로 나다닐 때 고을 사람들이 눈을 흘기곤 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종들이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가거나 빨래터에 앉을 때면 어김없이 귓골을 찌르는 소리가 있었다. “낳을 달에 못 낳았다면서?” “못 낳다마다. 어미가 마마에 걸려서 죽었지.” “사자는 그길로 데려가지 뭘 하러 다시 놓아주었대?” 아낙들은 무수가 태어날 무렵에 일어난 일을 두고 빈정거리는 것이었다. 무수의 어머니 김씨가 돌림병으로 숨을 거둔 후에도 뱃속에 있던 아기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본 집안사람들이 신령스럽게 생각하여 염습을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로부터 이렛날 이렛밤이 지나자 싸늘히 죽은 줄 알았던 김씨가 부스스 눈을 뜨더니 곧이어 산통을 하여 아기를 낳았다. 아기가 태어나던 순간, 마당을 서성거리고 있던 정호는 지붕 위로 흰 서기가 한 줄기 서려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정호는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겨서 아들의 이름을 무수라고 지었다. 아기의 이름 무수(茂壽)는 수명이 끝이 없다는 무수(無壽)에 다름 아니었다. “지붕 위로 흰 칼 같은 것이 휙 지나갔지, 아마.” “내 눈에는 칼이 아니고 긴 창이던걸?” “그러니 여럿 죽게 된 거지.” 여종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나누는 말에 어떤 경우라도 끼어들어서 입씨름을 하지 말라는 정호의 엄령이 내려져 있어서였다. “소자, 서당에 다녀오겠사옵니다.” 대문을 나서는 무수의 걸음이 무거웠다. 무수는 무수대로 남모르는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예전에는 서당에 갈 때면 온 고을 아이들이 대문 밖에 몰려 와 기다리곤 하였다. 하지만 산굴 사건 이후로는 대문 밖에 한 아이도 보이지 않았다. 서당에 가는 길에서 아이들을 만나도 슬금슬금 피하는 기색들이었다. 무수는 그런 아이들에게 일부러 다가가거나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는 몰라도 무수와 아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가 생겨나 있었다. 서당 훈장이 무수를 대하는 것이 예전 같지 않았다. 글공부 시간이면 무수가 온 고을에 들리도록 우렁차게 글을 읽고 욀 때마다 칭찬 일색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무수에게 글을 읽어보라고 시키기는커녕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쉬는 시간이면 글방 접장이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였는데, 오히려 화를 내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정무수! 네놈은 덩치가 크니, 두 자리 값을 내야 할 게다.” 글삯을 두 배로 내라는 엄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글공부가 끝날 때쯤이면 발로 허벅지를 툭 차며 명령하였다. “이놈아, 그 좋은 힘 뒀다 어디 쓰겠느냐. 글방 청소 좀 해 놓고 가거라.” 다른 날에는 여럿이 하던 청소도 무수에게 시킬 때면 꼭 혼자 쓸고 닦도록 하였다. 아이들이 남아서 거들어 줄 만 한데 모두 외면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무수는 묵묵히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었다. 혼잣말로도 불평 한 마디 내뱉은 적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서당에서 있었던 일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고을 아이들은 아무도 무수랑 같이 놀려고 들지 않았다. 집안에 있기가 무료하여 밖으로 나갔다가 골목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이들이 슬금슬금 다 피해 다녔다. 고을 큰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은 무수의 그림자만 보여도 꽁무니를 빼고 흩어져 버렸다. 무수는 그런 아이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들이 오히려 민망해할까 봐 고을 안에서는 땅만 보고 걸었다. 뒷산 기슭에 이르러서야 고개를 들고 산길로 내달렸다. 한달음 만에 무너진 산굴에 이르면, 벅찬 숨이 채 다 가라앉기도 전에 죽은 아이들의 명복을 빌어주고 내려오는 일과를 날돌이로 이어갔다. 고을사람들이 정호의 집을 찾지 않는 것도 않는 것이지만 방물장수, 등짐장수, 봇짐장수 같은 이들도 들지 않는 것이 큰 고심거리였다. 곡식이며 면포며 심심찮게 그들에게 내다 팔아야 할 것들을 팔지 못하고, 또 사 들여야 할 것들을 사들이지 못하니 집안 살림에 부족한 것들이 하나둘 늘어만 갔다. 장날이 되어 장터에 나가도 정호의 사람들에게는 장사치들이 아무 것도 팔지 않고 외면하였다.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와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도리 젓는 가솔들이었다. 정호의 본처 홍씨는 하소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용할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떨어져만 가는데 충당할 길이 없으니 예삿일이 아니옵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시오.” 정호는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겼지만 내심 우려를 하고 있었다. 동민들은 그렇다 치고 고을 이정(里正:리 단위의 행정 실무자)도 발걸음을 끊은 탓이었다. 초하루와 보름이면 꼬박꼬박 찾아와 군내 소식이나 면에서 일어난 일들, 그리고 시시콜콜한 본 고을 소식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들을 떠벌리곤 하던 그가 두 달이 넘도록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고립되어 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양면의 풍헌(風憲:면 단위의 행정 실무자)이 찾아왔다. 정호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으음. 아이들이 죽은 것에 일말의 도의적인 책임을 요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네.”(다음에 이어서 매주 월요일 연재 됩니다.)(작가 소개) 하용준 작가는 대구 출신으로 현재 경북 상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장편소설 ‘유기(留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장편. 단편소설, 시,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장편소설‘고래소녀 울치’는‘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 도서’와 ‘2013년 올해의 청소년 도서’에 동시 선정되었다. 시집 ‘멸(滅)’은 ‘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으며 제1회 문창문학상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 관련기사)http://www.smi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16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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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소설 정기룡] 제 1부 등불이 흐르는 강(제 3회) 제 1장 떠나는 두 사람.3 “우리 아이들이 평소에 저 아이의 명령에 순종해야 했으므로 어제도 틀림없이 저 아이가 산굴에서 나오지 못하게 명령을 했을 것이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한 자리에 들어 전부 몰살당할 리가 있겠사옵니까?” 이해는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의 말을 영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좌수의 의견을 물었다. 좌수는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무수가 저 혼자 살겠다고 산굴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범이 굴 앞에서 있었다면 오히려 범한테 잡혀 먹히러, 각설인 즉 혼자 죽으러 나온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좌수는 부모들에게 고개를 돌려서 말을 이어갔다. “자네들 같으면 마치 범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울부짖는 듯이 뇌성벽력이 치는 일후(日候:하루의 날씨)에, 더구나 세찬 비바람까지 몰아치는 터에 산굴 안에 들어있고 싶지 밖으로 나오고 싶겠는가?” 그들 중 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천둥치는 소리가 범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느니 하는 저 아이의 공술만을 믿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때 좌수도 힘주어 말하였다. “사또, 저 아이의 손을 처맨 것을 풀어보게 하소서.” 이해가 지시를 하였다. 사령 하나가 무수의 손을 감아 놓은 헝겊을 풀었다. 온통 짓이겨져서 시커먼 피딱지가 덕지덕지하였다. 좌수는 동헌 뜰이 울리도록 큰 음성을 내었다. “자, 여러분들! 저 열 손가락을 똑똑히 보게. 무수는 무너진 산굴 입구를 막고 있는 돌 더미를 치우느라 손이 다 터지고 무릎이 다 닳을 지경이 되었네. 마치 찢어진 넝마처럼 열손가락이 다 너덜너덜해지도록 돌 더미를 치우고 아이들을 구해내려고 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만약 무수가 고의로 아이들을 죽게 했다면 저럴 수가 있겠는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좌수는 한 번 더 물었다. “무수가 정녕 고의로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겠는가?” 여전히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해는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하문하였다. “아이들이 죽은 건 산굴이 무너졌기 때문인가? 아닌가?” 그들이 낮은 목소리로 산굴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이해는 또 물었다. “그렇다면, 산굴을 무너뜨린 게 누구인가? 저 아이가 무너뜨렸는가? 비바람 탓에 무너졌는가?”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해는 무수 옆에 놓여 있는 활과 화살을 보고 하문하였다. “그 궁시로 얼마나 멀리 쏘느냐?” “오십 보 안에 서 있는 적은 쏘는 대로 맞히옵고, 움직이는 적은 오시삼중(五矢三中:화살 다섯 발을 쏴서 세 발을 맞힘)은 하옵니다.” 무수가 한낱 놀잇감에 불과한 뽕나무활과 쑥대화살로써 각궁에 버금갈 만한 활 솜씨를 갖추었다고 믿은 이해는 대견스러워 하였다. 또한 무수의 입에서 진서(眞書:한자)가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더하였다. “서당은 다니느냐?” “그러하옵니다.” “뭘 읽고 있느냐?” “훈장님이 <명심보감>을 다 읽었으니 <소학>을 배울 차례라고 하였사옵니다.” “고작 열둘 어린나이에 벌써 <소학>을 읽다니, 허허.” 이해는 또 물었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무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대답하였다. “어떤 적에게도 지지 않는 장수가 되고 싶사옵니다.” 이해는 초초청이 열리고 있는 자리라는 것도 잠시 잊고 흐뭇해진 얼굴이 되었다. “허허, 소년장수로다. 과연 장재(將材:장수의 재목)로다.” 이해는 좌수에게 물었다. “저 아이의 아비는 뉘시오?” “예, 사또. 무수의 아비는 성명이 정호이온데, 비록 빈한한 선비이나 매양 예법에 소홀함이 없고, 몸가짐 마음가짐이 떳떳하지 않음이 없으며, 슬하에 둔 세 자식의 훈육에도 엄격하여 고을의 모범이 되어 왔사옵니다.” 이해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수의 뒤에 서 있는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일렀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 뒤 몇 마디 나누다가 그 중 한 사람이 볼멘소리를 내었다. “사또의 현명하신 처분만 바랄 뿐이옵니다.” 이해는 무수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소인의 불찰로 부하들이 비명에 다 죽은 마당에 어인 할 말이 있겠사옵니까? 엄중한 벌이 내려진다면 달게 받고자 할 뿐이옵니다.” 이해는 좌수에게도 마지막 의견을 구하였다. 좌수는 간곡히 말하였다. “사또, 갑자기 일후가 사나워져서 심대히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저 아이 홀로 살아남았다고 해서 어찌 죄를 묻겠사옵니까? 산굴이 무너져 내려 아이들이 참화를 당한 것은 실로 천재지변이 일어난 까닭이니 사람이 관여한 바가 아닌 줄 아옵니다.” 이해는 드디어 판결을 내렸다. “듣거라! 아이들이 죽은 것은 산굴이 저절로 무너진 탓이다. 만분다행의 천운이 따라 홀로 살아남았다고 해서 저 아이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죄는 산굴에게 묻고 비바람에게 따져야 할 것인 즉, 갱초(更招:재차 심문함)할 것도 없다. 수인 정무수를 무죄 방면하라.”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이 웅성대었다. 동헌 삼문 밖에서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백성들도 술렁였다. 이해는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본관은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참변을 당하고 만 것에 어버이와 같은 마음으로 안타까움과 슬픔을 금할 길이 없다. 산굴이 무너지는 바람에 죽은 아이가 있는 가호(家戶:호적이 있는 집)에는 앞으로 일 년 동안 모든 요역과 부세를 면제함으로써 그 애통한 마음을 위로하노라.” 말을 마친 이해가 일어서서 자리를 뜨자 급창이 얼른 외쳤다.(다음에 이어서 매주 월요일 연재 됩니다.)(작가 소개) 하용준 작가는 대구 출신으로 현재 경북 상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장편소설 ‘유기(留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장편. 단편소설, 시,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장편소설‘고래소녀 울치’는‘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 도서’와 ‘2013년 올해의 청소년 도서’에 동시 선정되었다. 시집 ‘멸(滅)’은 ‘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으며 제1회 문창문학상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 관련기사)http://www.smi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16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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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소설 정기룡] 제 1부 등불이 흐르는 강형방이 미리 받아 놓았던 무수의 가공초(假供招:죄인의 사전진술서)를 다 읽은 뒤에 아뢰었다. “이상이옵니다, 사또.” 곤양군수 이해는 다시 한 번 무수를 내려다보았다. 건장한 기골이 엿보였다. 아이답지 않은 면모였다. 눈썹은 굵고 짙었으며, 코는 곧고 우뚝하였고, 다문 입은 붉은 잎을 붙여 놓은 것 같았다. 눈빛은 매서우면서도 온화한 빛이 났다. 이해는 무수에게 하문하였다. “공술한 것에 추호의 거짓이 없느냐?” “그러하옵니다, 사또.” “산굴이 진영이라고? 어느 아이들과 싸우는 진영이냐?” “산 너머 고을 아이들이 무단히 우리 고을로 침노해 오기로 그 방비를 하는 요해처(要害處:요충지)이옵니다.” “산굴 속에 무엇을 갖추고 있었느냐?” “나무칼과 나무창, 방패 따위를 두었사옵고, 적에게 탈취한 병기 군물도 두었사옵니다.” 이해는 무수의 뒤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참변을 당한 아이들의 부모들은 듣거라. 그대들은 저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는가?” 그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뱉어내었다. “우리 아이가 억울하게 죽었사옵니다.” “저 아이가 산굴로 데려갔기 때문에 죽었는데 그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씀이옵니까?” “저 아이에게 극형을 내려주옵소서.” “제 명을 못 다 살고 죽은 우리 아이의 원혼을 달래주옵소서.”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급기야 흐느끼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해는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좌수에게 물었다. “좌수는 어찌 생각하시오?” “예, 사또. 소생이 알아본 즉, 무수가 고을 아이들을 산굴로 데려간 것이 아니라 함께 간 것이었사옵니다. 비록 골목대장으로서 앞장서서 갔다고 해서 아이들을 억지로 데리고 갔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더구나 글공부하고 있던 무수를 같이 놀자고 불러낸 것은 오히려 동네아이들이옵니다. 어제 낮에 골목이 떠나가도록 한 목소리로 소리쳐 불러내는 소리를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 들었다고 하옵니다.” 이해는 다시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을 바라보았다. “좌수의 말을 인정하는가?” 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곧 무수를 허물을 들추어내기 시작하였다. “언젠가 저 아이가 우리 집 소를 잡아먹겠다고 했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혼자 다 먹어치우겠다는 말을 하는 것을 소인도 들었사옵니다.” 이해는 무수에게 물었다. “사실이냐?” 무수는 잠시도 망설이지 오히려 반문하였다. “남아로서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할 말을 잃은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이 다시 원성을 쏟아놓았다. “사또, 저 아이가 우리 아이들에게 야릇한 명령을 무슨 군령이랍시고 늘 엄격하게 세워 놓고는 저 홀로 대장 노릇을 독차지했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제가 쏜 화살을 마치 졸개 부리듯이 매번 우리 아이들에게 주워 오게 했사옵니다.” “그뿐만이 아니옵니다. 제 화살을 주우러 가지 않는 아이는 돌덩이를 둥글게 포개어 놓고 그 안에 들어가게 한 뒤에 그곳이 옥사(獄舍:감옥)인 양 나오지 못하게 하였사옵니다.” “모든 아이들이 저 아이를 두려워하여 시키는 대로 복종하기만 하였지 단 한 마디도 거역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저 아이가 휘파람을 곧잘 부는데, 골목에서 별안간 그 소리를 듣게 되면 우리 아이가 입에 든 밥을 뱉어내고 달려 나가곤 하는 것이었사옵니다. 밥을 다 먹고 나가라고 하면, 군령이 떨어졌는데 맨 꼴찌가 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었사옵니다.” 이해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한 일들이 그대들의 아이들이 죽은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상관이 있어도 크게 있습지요.”(다음에 이어서 매주 월요일 연재 됩니다.)(작가 소개) 하용준 작가는 대구 출신으로 현재 경북 상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장편소설 ‘유기(留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장편. 단편소설, 시,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장편소설‘고래소녀 울치’는‘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 도서’와 ‘2013년 올해의 청소년 도서’에 동시 선정되었다. 시집 ‘멸(滅)’은 ‘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으며 제1회 문창문학상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 관련기사)http://www.smi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16586http://www.smi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16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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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소설 정기룡] 제 1부 등불이 흐르는 강(제 1회) 제 1장 떠나는 두 사람. 1"저놈을 냉큼 끌어내거라.” 형방의 말이 떨어지자 옥졸이 문을 열었다. “이놈, 썩 나오너라.” 옥간 안에서 검은 형체가 일어나 옥문 밖으로 나왔다. 형방이 군기침을 하며 앞서 가고, 그를 따라 왔던 두 사령이 양쪽에서 수인(囚人:죄인)의 팔을 끌고 뒤따라갔다. 동헌 섬돌 좌우에는 중갓을 쓴 육방 아전들이 셋씩 나누어 서 있었다. 계단 아래에는 환도를 찬 병방군관이, 그 옆 그늘대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에는 형전이 놓여 있었다. 형방서원이 탁자 앞에 앉아 작은 벼루에 몽당먹을 갈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좌수가 의자에 앉아 있었고, 별감 두 사람이 그 옆에 서 있었다. 뜰에는 복두를 쓴 형방사령들을 위시한 각 방 사령들이 줄줄이 서 있었고, 삼문 안쪽에는 포두사령들이 삼지창을 들고 길게 늘 지어 서 있었다. 동헌 뜰 한가운데에 이르러 사령들은 수인의 양 오금을 발로 차 털썩 꿇어앉혔다. 수인은 피칠갑을 한 두 손을 헝겊으로 처매고 있었다. 형방이 수인 옆에 벙테기활과 쑥대화살, 그리고 팔매줄을 던져 놓았다. 수인이 꿇어앉아 있는 뒤로는 한 무리 어른들이 서 있었다. 삼문 밖에는 고을 백성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웅성거리고 있는 겨를에 어디선가 급창(及唱:벼슬아치의 입출입을 알리던 아이종)이 외치는 소리가 났다. “어라 휘이, 본관사또 등청이오!” 동헌에 시립해 있던 육방관속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곤양군수 이해가 나왔다. 대청마루에 놓인 교의에 올라 좌정을 하였다. 눈 앞 사방을 둘러본 이해는 뜰에 꿇어 앉아 있는 수인을 잠시 굽어보았다. 섬돌 바로 앞에 서 있던 호장 강세정이 주위를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금양면 산굴 붕괴 사건에 대한 초초(初招:최초의 심문)를 개청하겠사옵니다.” 고군이 큰 북을 세 차례 힘껏 쳤다. “둥, 둥, 둥!” 호장이 눈짓을 하였다. 형방이 두루마리를 펴 들고 목청 좋게 읽어 내렸다. “계유년 유월 이십팔일, 본군 금양면 당산골에 사는 해동(孩童:15세 이하의 어린아이) 정무수는...... .” “대장, 빨리 나와!” 동네 아이들이 무수의 집 앞에서 소리쳤다. 무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읽고 있던 책을 얼른 덮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대문 앞에 모여 있던 동네아이들과 함께 고을 뒷산에 올랐다. 산중턱에 있는 바위굴 앞에 이르렀다. 무수를 비롯한 당산골 아이들이 진영으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굴 안으로 들어간 무수는 깊숙이 놓여 있는 군물을 점검하였다. 각종 병기와 방패 등이었다. 아이들과 둘러 앉아 군략(軍略:군사작전)을 의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천둥치는 소리가 쾅쾅 들려왔다. 다 같이 굴 입구 쪽으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사방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차츰 온 천지가 캄캄해지더니 세찬 돌풍이 불고, 억수 같은 비까지 쏟아 부었다. 하늘을 찢어 놓고 땅을 쪼개는 듯한 뇌성벽력이 귓고막을 때렸다. 아이들은 간담이 서늘하였다. 한 아이가 무서워하며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따라 하였다. 무수도 다시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굴 안에서도 천둥소리는 여전히 크게 들렸다. 마치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와도 같았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백 수천 마리가 한 자리에 모여서 울부짖는 듯하였다. 여간해서는 그칠 날씨 같지가 않았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한참을 굴 안에서 보냈다. 여름이지만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온몸이 으슬으슬하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을 지도 몰랐다. “이제 그만 나가자.” “무서운데...... .” “대장, 비라도 그치면 나가자, 응?” 아이들은 굴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무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 내가 먼저 나가보고 올게.” “대장, 나가지 마. 굴 밖에 진짜로 호랑이가 와 있을지도 몰라.” 무수는 씩 웃었다. “비를 맞고 다니는 청승맞은 호랑이가 어디 있겠어?” “그거 그러네. 그럼 대장이 살펴보고 와.” “알았어.” ‘그래도 혹시나 호랑이가 와 있다면...... .’ 줄팔매는 허리에 차고, 활에 화살을 먹여 든 무수는 굴 입구로 갔다. 다행히 호랑이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잦아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늘 한쪽이 밝아오고 있었다. 무수는 먹구름이 물러가나 하여 밖으로 나와서 먼 하늘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쿠쿵, 콰르르!” 무수는 움찔 놀라 얼른 뒤돌아보았다. 굴 입구가 연기로 자욱하였다. 무수는 무슨 일인가 하여 다가갔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삽시간에 굴이 무너져 크고 작은 돌 더미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입구를 막고 있는 것이었다. “애들아!” 무수는 넋이 나간 듯이 돌 더미에 달려들었다. 돌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무수는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저물녘이 되도록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어른들은 뒷산으로 올랐다. 산굴 앞에서 한 아이가 허리를 굽힌 채 안간힘을 쓰며 무언가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음에 이어서 매주 월요일 연재 됩니다.)(작가 소개) 하용준 작가는 대구 출신으로 현재 경북 상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장편소설 ‘유기(留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장편. 단편소설, 시,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장편소설‘고래소녀 울치’는‘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 도서’와 ‘2013년 올해의 청소년 도서’에 동시 선정되었다. 시집 ‘멸(滅)’은 ‘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으며 제1회 문창문학상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 관련기사)http://www.smi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16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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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스님의 함창 고령가야 이야기] 7 雄州巨牧함창을 일러 고을이 크고 물산이 풍부하다는 雄州巨牧이라 불러왔다. 예로부터 상주 함창을 일러 고을이 크고 물산이 풍부하다는 의미의 웅주거목이라는 상징어로 불러왔었다. 필자는 함창의 고령가야 문헌을 공부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서 웅주거목(雄州巨牧)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하였다. 오봉산 고분 내부에서 이병도(1896~1989)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웅주거목의 고장으로 경남 진주가 함령의 고령가야 터전이 아니겠느냐 는 지극히 애매한 논조로 진주의 고령 가야설을 언급했다. 한편으로 상주에 대한 옛 기록을 찾아보면 웅주거목이라는 문구가 수시로 등장하면서 상주고을을 상징하는 용어로 많이 쓰여 왔음을 볼 수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비롯하여 동국여지승람에도 상주를 일러 물산이 풍부하고 고을이 크며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서의 웅주거목을 거론하였다. 김종직 선생의 문경, 상주 여행기를 보더라도 北으로는 새재를 넘어 한강에 닿으며 東으로는 안동, 예천과 맞닿으며 西로는 청주, 보은과 연결되고 南으로는 대구, 선산 등 영남하도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요충지임을 강조한다. 그 뿐 아니라 수운이 발달하여 남쪽으로는 낙동강을 통해 남해에 닿으며 북으로는 새재를 넘어 한강을 통해 한양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봉상 고분 이병도 교수가 고령가야를 경남 진주로 비정 하고자 하는 이유로 세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첫째가 함창이 김해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고 둘째는 ‘거열’이라는 진주 옛 지명의 발음이 고령과 비슷하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진주가 상대적으로 김해와 가까우며 웅주거목으로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병도 교수가 삼국유사를 비롯한 고대사를 개괄적으로 보여 주었지만 고령가야 부분에 있어서만은 놓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5가야나 6가야의 내용을 가지고 고령가야를 설명하다 보니 내용이 빈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실 고령가야 부분의 기록은 삼국유사보다는 삼국사기가 훨씬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오봉산 출토 유물 특히 함령군(현 함창)의 속현으로 적시한 가은, 문경, 호계 부분을 이병도 교수가 일체 언급하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삼국사기의 내용을 빠뜨렸다고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첫째, 둘째 이유가 불합리하다는 반론을 앞장에서 몇 번 거론한 바 있다. 세 번째 이유인 지리적 요건으로써 웅주거목을 거론한 만큼 웅주(雄州)와 거목(巨牧)으로써 상주, 함창의 위상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문경을 포함한 상주, 함창은 지리적으로 붙어있으며 역사적으로 같은 문화권임은 익히 알려진 바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남에서 경주 다음가는 대처(大處)로서 그 지위나 명성을 유지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선 낙동강과 소백산맥의 여러명산들을 병풍 삼아 함창평야와 상주평야가 넓게 포진하고 있다. 고려 이후 영남을 관할하는 상주목이 설치되었으며 경상도명을 나타내는 상 자(字)가 경주의 경 자(字)와 함께 등재되어 있다. 실제 벼 수확량을 비교하면 지난해 기준으로 상주는7.5만 톤으로 경주의 7.1만 톤보다 많고 진주의 3.5만 톤 보다는 2배 이상으로 단연 으뜸이다. 조선시대 홍귀달 선생이 함창 지역을 소개하는 대목에 ‘공검저수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공검지는 지금은 공검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지만 옛 행정구역으로는 함창군에 속했던 것이다. 아득한 옛날 공검 저수지를 건설하면서 둑이 터져 여러 번 실패 한 끝에 인신공양을 올려서 완성을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영산강 옹관묘 출토 유물 고대에는 대형 공사를 실시 할 때 인신공양을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우리나라 인신공양 기록으로는 경주 에밀레종 조성과 심청전의 인당수 그리고 공검지 축조에 은근히 나오는 내용이다. 공검지는 삼한시대에 축조한 영남제일규모의 저수지로써 그만큼 함창을 비롯한 고령가야지역의 경지가 넓고 수로가 발달하였다는 방증이다. 낙동강의 풍부한 물을 끌어들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한편으로 수운을 이용하여 남해바다의 해산물과 소금을 어렵지 않게 공급받을 수 있는 여건도 한 몫 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영남의 물산을 낙동강을 이용하여 조령, 한강을 거쳐 서울까지 운행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도 간과할 수 없다. 이렇듯 함창을 비롯한 우리 고장은 남으로는 부산, 북으로는 서울, 동으로는 안동, 서로는 청주와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제반조건을 고려하면 이병도 교수가 주장하는 웅주거목이란 바로 상주, 함창을 두고 한 말임에 틀림없다. 문경을 포함한 상주, 함창은 영남의 웅주거목으로써 양보할 수 없는 입지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셈이다. 함창이 고령가야의 본래 터전임을 명확히 밝히고 유실된 역사문화를 정립할 인연이 도래했음을 만천하에 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지정 스님 프로필] ▣ 1965년 경북 영덕 출생 ▣ 1985년 문경 봉암사 출가 ▣ 서암 대종사를 은사로 득도 ▣ 법주사 승가대학 졸업 ▣ 실상사 화엄 학림 졸업 ▣ 전국 선원 10하 성만 ▣ 예천 장안사 주지(역임) ▣ 김천 직지사 교무 시무 ▣ 현) 봉천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