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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스님의 함창 고녕가야 이야기] 고로(高老) 태조왕릉

기사입력 2021.02.01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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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창역에서 도보로 10여분 걸어가면 민가 한가운데 낯 설은 무덤이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있다

     



    안내판에는 경북기념물 제26호로 전() 고령가야 태조왕릉이라 적혀있고 좌()로는 만세각을 비롯해 여러 전각들이 줄지어 있다. 뒤 쪽 산 능선처럼 불룩한 부분에 아담하게 봉분이 자리 잡고 있다. 봉분 앞에는 이끼 낀 우마(牛馬)상과 문인석, 무인석이 우뚝서서 옛 왕의 무덤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비석에는 왕릉의 내력과 고녕가야의 역사를 적어놓았다.

    임진란이 일어나던 1592년 관찰사 김수와 함창현감 이국필이 무덤 앞에 박혀있는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고 고령가야태조왕릉이라는 각자를 발견했다. 그로 인하여 숙종임금의 왕명으로 묘역을 새로 정비하고 매년 101일과 강생(降生)일인 3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500여 년 전 비석에 이미 적혀져 있은 만큼 사기(史記) 등 여러 가지 사료와 대조해보면 충분한 근거를 우리들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필자는 유적에 관심이 많아 20대부터 전국으로 방랑하면서 고인(古人)들의 흔적을 찾아다니곤 했다. 그 중 가야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으로는 김해의 수로왕릉과 경남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 그리고 함창의 고로(高老) 태조왕릉이 전부였다. 고령의 대가야나 함안의 아라가야, 창녕의 비화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를 둘러보아도 고분(古墳)은 수백 개 있어도 왕의 이름을 적시한 곳은 이 세 곳 외에는 본적이 없다.

    삼국사기 김유신()에 보면 금관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되어 532년에 멸망했으며 대가야는 그로부터 30년 뒤 56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가락국기를 보면 하늘에서 붉은빛 구름을 타고 여섯 개의 알이 내려왔으니 가장 큰 것은 수로왕으로 금관가야 왕이 되었으며 둘째는 함창 고녕가야를 건설하여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 나머지 네 개의 알도 각기 가야의 왕이 되어 치세하였다고 한다. 금관가야는 9대를 내려오면서 500여년을 존속했으며 마지막 구형왕 때에 이르러 신라에 정복당했다.

     



    신라에서 식읍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지만 구형왕은 망국의 한을 안고 지리산 달궁에서 자연인으로 지내다 죽었다. 그의 손자가 김유신 장군이며 신라의 진골인 춘추무열왕과 인연을 맺어 권력의 핵심에 귀착한 것이다. 구형왕의 사당은 산청군 수동면에 있고 무덤은 사당에서 떨어진 산비탈에 적석돌탑으로 이루어져있다. 필자는 20여 년 전 남원 실상사에 살면서 그곳에 가끔 들러서 망국을 맞은 구형왕의 한()과 신라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의 정()을 느껴보고는 했다. 대가야는 이진아시왕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16520년간 존속했다고 한다.
     

    함창고녕가야 비석과 그들의 족보에 기록되어있는 바로는 첫 번 째 왕은 고로(高老) 벽진으로 태조왕으로 즉위하여 115년간 통치하였다고 한다. 2대 마종왕 65, 3대 아현왕 35년 등 모두 213년을 통치하다가 신라 첨혜왕 때 정복당한 뒤 왕족을 이끌고 김해로 내려갔다고 전한다. 태조왕의 막내 동생인 말로는 현재 고성의 소가야의 왕이 되었다. 한편 상주의 사벌국과 고녕가야 지배층의 반란을 우려해서 신라에서는 이들을 오늘날 영덕지방으로 집단 이주시켰다는 전설도 있다.
     


    이렇듯 함창 고녕가야에 대한 기록은 정사(正史), 야사(野史)를 비롯해 고려사(高麗史),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바이다. 현존하는 태조왕릉과 왕비릉과 함께 신흥리 오봉산에는 수 많은 고분이 입을 벌린 채 안목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서 출토된 수만 점의 철기유물과 토기류는 타 지역으로 전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성혈석이라는 가야문화의 핵심요소도 발견되었으며 허황후가 들여온 남방불교의 사찰 터도 남아있다. 용화사 석탑과 석불은 당시의 소식을 알고 있는지 화려한 문양과 은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증거하고 있다.
     

    바야흐로 세태는 문화와 생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반도체, 자동차 산업보다도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유적, 유물과 자연의 산물들이다. 이것은 자본과 기술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과 문명 그리고 우주의 조화가 빚어내는 것이다.
     

    함창 고녕가야가 그 모든 요소를 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경을 포함한 상주, 함창은 이러한 보배중의 보배를 도둑당하고도 그러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 주권이 엉뚱하게 경남 진주로 이관되었으니 통탄할 일이다. 지금이라도 학술적 토대를 검토하여 빼앗긴 문화의 주권을 빨리 찾아와야 한다.

    진주는 거열가야의 유산이 있고 함창은 고녕가야의 본거지이다. 진주(晉州)설 뿐 아니라 사료와 근거를 무시하고 해괴한 이설(異說)로 기발한 이론을 만들어 함창고녕가야의 근거를 훼손하는 논문들을 더러 접할 수 있다. 빈도(貧道)의 무욕한 입장에서 바라볼 때 공부 많이 한 무지한 학자의 만용으로 느껴져 씁쓸하다.

    지난해 가야문화 복원사업에 5가야를 비롯하여 호남의 남원, 장수까지 발 벗고 나서 수천억 씩 재정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정작 함창고녕가야는 심사에서 제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이와 같이 분명한 사료와 유물, 유적이 번연히 있는데도 역사적 정립을 못하는 것은 지역민의 무관심 뿐 아니라 제도권 학계의 장벽이 높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각자 각성하고 고녕가야 역사복원을 위해 분발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고령의 대가야와 구별하기 위해서 함창은 원래 발음대로 고녕가야로 표기했습니다.
     

    [지정 스님 프로필]
     

    1965년 경북 영덕 출생

    1985년 문경 봉암사 출가

    서암 대종사를 은사로 득도

    법주사 승가대학 졸업

    실상사 화엄 학림 졸업

    전국 선원 10하 성만

    예천 장안사 주지(역임)

    김천 직지사 교무 시무

    ) 봉천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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