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2 (일)
제 1장 떠나는 두 사람.3
“우리 아이들이 평소에 저 아이의 명령에 순종해야 했으므로 어제도 틀림없이 저 아이가 산굴에서 나오지 못하게 명령을 했을 것이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한 자리에 들어 전부 몰살당할 리가 있겠사옵니까?”
이해는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의 말을 영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좌수의 의견을 물었다. 좌수는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무수가 저 혼자 살겠다고 산굴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범이 굴 앞에서 있었다면 오히려 범한테 잡혀 먹히러, 각설인 즉 혼자 죽으러 나온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좌수는 부모들에게 고개를 돌려서 말을 이어갔다.
“자네들 같으면 마치 범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울부짖는 듯이 뇌성벽력이 치는 일후(日候:하루의 날씨)에, 더구나 세찬 비바람까지 몰아치는 터에 산굴 안에 들어있고 싶지 밖으로 나오고 싶겠는가?”
그들 중 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천둥치는 소리가 범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느니 하는 저 아이의 공술만을 믿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때 좌수도 힘주어 말하였다.
“사또, 저 아이의 손을 처맨 것을 풀어보게 하소서.”
이해가 지시를 하였다. 사령 하나가 무수의 손을 감아 놓은 헝겊을 풀었다. 온통 짓이겨져서 시커먼 피딱지가 덕지덕지하였다. 좌수는 동헌 뜰이 울리도록 큰 음성을 내었다.
“자, 여러분들! 저 열 손가락을 똑똑히 보게. 무수는 무너진 산굴 입구를 막고 있는 돌 더미를 치우느라 손이 다 터지고 무릎이 다 닳을 지경이 되었네. 마치 찢어진 넝마처럼 열손가락이 다 너덜너덜해지도록 돌 더미를 치우고 아이들을 구해내려고 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만약 무수가 고의로 아이들을 죽게 했다면 저럴 수가 있겠는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좌수는 한 번 더 물었다.
“무수가 정녕 고의로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겠는가?”
여전히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해는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하문하였다.
“아이들이 죽은 건 산굴이 무너졌기 때문인가? 아닌가?”
그들이 낮은 목소리로 산굴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이해는 또 물었다.
“그렇다면, 산굴을 무너뜨린 게 누구인가? 저 아이가 무너뜨렸는가? 비바람 탓에 무너졌는가?”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해는 무수 옆에 놓여 있는 활과 화살을 보고 하문하였다.
“그 궁시로 얼마나 멀리 쏘느냐?”
“오십 보 안에 서 있는 적은 쏘는 대로 맞히옵고, 움직이는 적은 오시삼중(五矢三中:화살 다섯 발을 쏴서 세 발을 맞힘)은 하옵니다.”
무수가 한낱 놀잇감에 불과한 뽕나무활과 쑥대화살로써 각궁에 버금갈 만한 활 솜씨를 갖추었다고 믿은 이해는 대견스러워 하였다. 또한 무수의 입에서 진서(眞書:한자)가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더하였다.
“서당은 다니느냐?”
“그러하옵니다.”
“뭘 읽고 있느냐?”
“훈장님이 <명심보감>을 다 읽었으니 <소학>을 배울 차례라고 하였사옵니다.”
“고작 열둘 어린나이에 벌써 <소학>을 읽다니, 허허.”
이해는 또 물었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무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대답하였다.
“어떤 적에게도 지지 않는 장수가 되고 싶사옵니다.”
이해는 초초청이 열리고 있는 자리라는 것도 잠시 잊고 흐뭇해진 얼굴이 되었다.
“허허, 소년장수로다. 과연 장재(將材:장수의 재목)로다.”
이해는 좌수에게 물었다.
“저 아이의 아비는 뉘시오?”
“예, 사또. 무수의 아비는 성명이 정호이온데, 비록 빈한한 선비이나 매양 예법에 소홀함이 없고, 몸가짐 마음가짐이 떳떳하지 않음이 없으며, 슬하에 둔 세 자식의 훈육에도 엄격하여 고을의 모범이 되어 왔사옵니다.”
이해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수의 뒤에 서 있는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일렀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 뒤 몇 마디 나누다가 그 중 한 사람이 볼멘소리를 내었다.
“사또의 현명하신 처분만 바랄 뿐이옵니다.”
이해는 무수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소인의 불찰로 부하들이 비명에 다 죽은 마당에 어인 할 말이 있겠사옵니까? 엄중한 벌이 내려진다면 달게 받고자 할 뿐이옵니다.”
이해는 좌수에게도 마지막 의견을 구하였다. 좌수는 간곡히 말하였다.
“사또, 갑자기 일후가 사나워져서 심대히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저 아이 홀로 살아남았다고 해서 어찌 죄를 묻겠사옵니까? 산굴이 무너져 내려 아이들이 참화를 당한 것은 실로 천재지변이 일어난 까닭이니 사람이 관여한 바가 아닌 줄 아옵니다.”
이해는 드디어 판결을 내렸다.
“듣거라! 아이들이 죽은 것은 산굴이 저절로 무너진 탓이다. 만분다행의 천운이 따라 홀로 살아남았다고 해서 저 아이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죄는 산굴에게 묻고 비바람에게 따져야 할 것인 즉, 갱초(更招:재차 심문함)할 것도 없다. 수인 정무수를 무죄 방면하라.”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이 웅성대었다. 동헌 삼문 밖에서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백성들도 술렁였다. 이해는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본관은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참변을 당하고 만 것에 어버이와 같은 마음으로 안타까움과 슬픔을 금할 길이 없다. 산굴이 무너지는 바람에 죽은 아이가 있는 가호(家戶:호적이 있는 집)에는 앞으로 일 년 동안 모든 요역과 부세를 면제함으로써 그 애통한 마음을 위로하노라.”
말을 마친 이해가 일어서서 자리를 뜨자 급창이 얼른 외쳤다.
(다음에 이어서 매주 월요일 연재 됩니다.)
(작가 소개)
하용준 작가는 대구 출신으로 현재 경북 상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장편소설 ‘유기(留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장편. 단편소설, 시,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장편소설‘고래소녀 울치’는‘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 도서’와 ‘2013년 올해의 청소년 도서’에 동시 선정되었다.
시집 ‘멸(滅)’은 ‘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으며 제1회 문창문학상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 관련기사)
http://www.smi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16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