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1 (토)
제 1장 떠나는 두 사람.6
“날이 곧 어두워질 텐데 어딜 가려고?”
“염려 마시어요. 얼른 다녀올게요.”
무수는 뒷산 중턱으로 내달렸다. 산굴 앞에 이르러 털썩 주저앉았다. 숨을 고른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동무들아, 미안해.”
죽은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거듭 사죄를 하였다. 그리고는 비장감이 묻어나는 말을 하였다.
“난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당산골로 돌아오지 않을 테야. 죽어서도 안 올 거야. 그러니 이제 너희들한테 찾아오지도 못해.”
하고 싶은 말을 다 마친 무수는 옆으로 돌아앉았다. 먼 남해 바다 위로 노을이 비끼고 있었다. 무릎을 두 팔로 껴안고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여기 있었구나?”
인수의 목소리였다. 무수는 일어났다.
“예, 작은도련님.”
“아무도 없을 때에는 형이라 부르라고 해도 자꾸 그러는구나.”
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 앉거라.”
둘은 나란히 앉았다. 인수는 노을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아버지께서 떠나라고 하셨다지?”
“예.”
“우리가 비록 어머니는 다르다고 해도 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엄연한 형제다. 어딜 가서 무얼 하더라도 그것만은 잊지 않도록 하거라, 알겠니?”
“예, 작은도련님, 아,아니 작은형님.”
인수는 허리춤에 찬 비단주머니를 끌러 무수에게 건넸다. 무수는 선뜻 받아들지 않았다.
“형이 주는 거니까 괜찮아. 꼭 필요할 때 팔아서 쓰거라. 돈닷냥은 될 게다.”
인수는 무수의 손을 잡고 비단주머니를 쥐어 주었다.
“그만 내려가자.”
산을 내려오는 내내 인수는 무수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고을에 들어서서야 인수는 무수의 손을 놓아 주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무수는 몇 걸음 뒤에 처져서 땅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
날이 밝자 김씨는 무수를 앞세워 사랑채로 갔다. 정호는 면포에 싼 것을 내어 놓았다.
“얼마 안 되는 것이네만, 요긴할 때 쓰도록 하게.”
김씨가 집어넣는 것을 보고는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진주 강주골로 가게. 거기 사는 일가한테 무수가 정남(丁男:군역을 담당하기 시작하는 15세 이상의 남자)이 될 때까지 두 모자를 보살펴 달라고 기별해 놓았네. 강주 고을을 찾아가면 큰 기와집 앞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서 있을 것이네. 바로 그 집을 찾아가서 내가 보냈다고 하면 거두어 줄 것일세.”
김씨는 무수를 일으켜 정호에게 큰절을 하였다.
“나리, 부디 만수무강하소서.”
정호는 김씨와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무수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무수는 하직 인사를 하였다.
“만수무강하소서.”
정호는 다정스런 목소리로 무수에게 물었다.
“그래 무수 너는 뭘 챙겨 가는고?”
“봇짐하고 팔매줄을 갖고 가옵니다.”
“궁시(弓矢:활과 화살)는 어떻게 하고?”
“그건 잘 부러지는 것이라...... .”
“가거든 어미 잘 모시고 있다가 내가 기별을 하면 그때 돌아오거라. 알겠느냐?”
무수는 대답 없이 고개만 숙였다.
곤양 당산골에서 진주 강주골까지는 백리 길. 아낙의 걸음으로는 사흘반걸이였다. 길잠을 얻어 자며, 주막잠도 자며 걷고 또 걸었다. 김씨는 큰 보따리를 이고, 무수는 작은 봇짐을 메었다. 두 모자는 붙은 듯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김씨는 낯선 세상에 내쳐진 것만 같았지만 든든한 아들이 곁에 있어 위안이 되었다. 떠나온 것이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무수가 당산골에 있어봐야 좋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었다.
무수가 커가면 커갈수록 산굴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괄시가 더욱 거세질 것 같았다. 내 자식은 비명에 죽었는데, 남의 자식은 번듯하게 살아 있는 것만큼 억울하고 한 맺히는 일이 어디 있으랴 싶었다.
‘그래, 다 잊고 새 고을에서 새로 시작하는 거야.’
영험한 아들을 낳기 위해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목숨이 아닌가 말이다. 죽은 지 이레 만에 되살아난 모진 목숨으로 무엇인들 못하랴. 살이 마르고 뼈마디가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무수를 잘 키워내고자 하는 일념뿐이었다.
“우리 무수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어떤 적에게도 지지 않는 장수가 될 터여요.”
“글공부해서 정승 판서는 되고 싶지 않아?”
“작은형님이 그건 어렵다고 했어요. 저는 무과밖에 볼 수 없다고 하였어요. 정승이든 판서든 저는 시켜 줘도 안 할래요. 장수가 제일 나아요. 부하들을 호령하고 천지사방으로 말달리는 장수요.”
“그래. 그러면 꼭 큰 장수가 되려므나.”
모퉁이를 돌아들었다. 길 가에 샘터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짐을 내려놓고 목을 축였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다음에 이어서 매주 월요일 연재 됩니다.)
(작가 소개)
하용준 작가는 대구 출신으로 현재 경북 상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장편소설 ‘유기(留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장편. 단편소설, 시,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장편소설‘고래소녀 울치’는‘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 도서’와 ‘2013년 올해의 청소년 도서’에 동시 선정되었다.
시집 ‘멸(滅)’은 ‘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으며 제1회 문창문학상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 관련기사)
http://www.sminews.co.kr/front/news/view.do?articleId=ARTICLE_00016586